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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영원에 잇대기3271

다른 게 죄가 아니고 한낮에도 산책이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시절이다. 낮에 나가야 하나하나 눈을 맞출 수가 있는데. 뷰 포인트다. 논이 있고, 멀리 든든한 배경의 나무가 있고. 이 즈음엔 심지어 코스모스가 바로 앞에서 유혹을 한다. 내적 여정은 기도의 여정이라는 안내를 하면서 "이 날씨에 산책하지 않는 것은 죄예요." 했더니 어느 간사님이 "저녁에 설교가 있어서, 설교 준비하느라 죄를 짓네요." 했다. 내가 "하이고, 죄 중에 잉태한 설교네요." 했다. 많은 경우, 설교는 죄에서 잉태하지. 어쩌면 좋은 설교는 더욱 죄에서. 어쨌든 나가 걷지 않으면 죄가 될 정도의 좋은 날들이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들꽃 한 송이를 보듬고 계시다. 2023. 10. 17.
인생의 빛 학교 어느 미지의 장소, 그리고 밤이었다. 나는 세찬 폭풍을 받으며 힘들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나는 작은 등불을 들고 양손으로 그것을 보호하며 걸어갔는데 그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내가 이 작은 등불을 살리는 데 달려 있었다. 별안간 나는 무엇인가가 나를 뒤따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뒤돌아보니 거기에 내 뒤로 다가오는 거대한 검은 형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놀랐음에도 불구하고-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이 불빛을 이 밤이 새도록 폭풍 가운데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카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에 나오는 융 자신의 꿈이다. 이 꿈을 통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꿈을 꾸었던 시절의 삶에 대한 성찰로 .. 2023. 10. 15.
과일 종합 선물 세트 이것은 다른 크기, 다른 모양의 감이 아무렇지 않게 담긴 종이봉투. 참으로 정겨운 과일 종합 선물 세트. 포장지 반, 과일 반에 예쁜데 똑같이 예뻐서 여러 종류인데 한 종류처럼 보이는 비싼 과일 바구니가 넘볼 수 없는 품격의 과일 종합 선물 세트! 좋더라고… 따뜻하고… 2023. 10. 12.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계절이 계절의 때를 알고 찾아오고, 계절이 떠날 때를 알아 순순히 떠난다.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계절, 제 때를 알고 찾아온 계절이 교차할 때, 나의 계절을 생각한다. 계절이 좋은 설교이고 계절을 마주할 때 나는 정직한 구도자가 된다. 깊고 고요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럴 땐 이런 이유로 저럴 땐 저런 이유로 산책을 포기할 수 없지만,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이 이 즈음 같은 때가 없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느라 이 즈음 산책 길엔 목이 빠진다. 이 즈음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낮이고 밤이고 간에. * 재밌는 사연 끼워 팔기 * (JP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등 대고 대화 중) JP : 야아, 공기가 차다. 계절이 지나가고 있어... SS : 그러게... 2023. 10. 11.
작전명 초파리 연휴 마지막 날, 아이들 늦잠이 더 늦어진다. 둘이 일어나 아침 묵상하고 밥 먹고 커피 마시도록 아이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휴일이니 깨우지 않아도 되지만, 깨우고 싶기도 하고. 어제 끓인 김치찌개를 데우며 밥을 안쳤다. 그리고 남편에게 "작전명 초파리!" 하고 말했다. 김치찌개 데우는 냄새가 퍼지면 하나씩 기어 나올 것이다. 멜론 깎아 식탁에 놓아 달달한 향기 퍼지면 초파리들 모여들듯이. 반응은 금방 오지! 주방 옆 방에서 큰 초파리 등장. "크로와상 먹을래?" "아니, 나 밥 먹을래." 남편에게 눈으로 확인. "거 봐! 초파리 작전 성공이지?" 추석 헤세드로 스팸이 풍성하고 햅쌀이 반짝반짝... 어제 김치찌개에 스팸 한 통 더 추가하고 금방 한 햅쌀밥이니 세상 제일 맛있는 밥 아닌가! 초파리 둘 시간 .. 2023. 10. 3.
대놓고 이러신다, 또! 현관 나서자마자 빰에 닿는 바람에... 그 가벼운 밤 공기에... 가을로 가득 찬 계절이 지나는 하늘에... 이미 다 써놓으셨으면서… 읽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 숨이 막히도록 느끼고 있는데... . . . . . . . 대놓고 이러신다. 지나가는 사람 다 보는데 민망하게 이러신다. 안다구요. JESUS님! 2023. 10. 2.
쵝오! 어쨌든 쵝오! 추석 음식 준비를 하다 손을 베었다. 상처가 크진 않은데 깊어서 피가 콸콸콸 솟아났다. 처음 있는 일인데 여러 번 겪었던 것 같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명절 음식 준비하는 어느 여인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고, 내 일인데 내 일만 같이 않고, 남 일 같은 내 일, 내 일 같은 남 일이라 여겨졌다. 피의 연대... 여성들의 연대는 피의 연대! 음식 준비라야, 바비큐 재료 장 보는 것, 월남쌈 재료 준비, 국 하나 끓이는 정도였다. 아이들 다 빠지고 어른 다섯이서 펜션으로 가는 명절이라 (평소보다) 가벼운 일이었다. 명절이 내게는 (아니 모든 여성에게) 단지 일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이기도 마음의 문제이기도. 과도한 책임감, 그보다는 죄책감, 혐오감을 마주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2023. 9. 29.
교회를 확신했던 시간들 엊그제 집단 여정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내게 교회란?" 질문을 가져온 분의 답은 "엄마 아빠를 대신한 곳, 엄마 아빠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준 곳"이라고 했다. 교회 아닌 어디에서도 주목받거나 칭찬받지 못했는데 칭찬받고 사랑받았던 곳이라고. 비슷한 답을 하는 분들이 있었고, 내게도 교회는 그런 곳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낸 교회에 다녀왔다. JP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은 곳이다. 두루두루 큰 사랑을 받았고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그러다 깊이 절망하고 상처를 안고 떠나온 곳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늘 예측불가, 설명불가라... 좀 놀라운데 그냥 "다녀왔다"라고 쓰겠다. 모님이 강의하러 오신다고 다른 교회 다니고 있는 부러 수련회에 참석해 준 친구들이 큰 .. 2023. 9. 28.
파콩불 마트에서 양념된 고기를 사다 먹일 때, 약간의 죄책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죄책감을 터는 방법은 마늘 같은 걸 듬뿍 넣어 다시 주물러 쟁이는 것이다. 그러고도 남은 MSG 죄책감은 다른 재료를 섞어 보는 것인데. 콩나물과 파채를 넣되, 파를 엄청나게 많이 넣었다. 그러면 먹을 사람이 먼저 이름을 짓는다. "오오오! 콩불이야?" 이름까지 새로 지어지면 게임 끝난 건데... 난 또 여기서 만족을 못하지. 한 글자 얹어서 "응, 파콩불이야!" 파 마늘은 진리다! 2023. 9. 21.
너네 엄마 금쪽이 아침 묵상과 기도를 마칠 즈음이면 벌컥, 벌컥, 벌컥 방문이 세 번 열리고 시간 차 공격으로 세 사람이 나온다. 오늘은 두 전사가 참전을 포기하고 현승이만 벌컥, 하고 등장했다. 채윤이는 연습 때문에 학교 앞에 고시텔을 잡아 나갔고 JP는 아직이다. 둘이 마주 앉아서 막 되는대로 아침을 먹었다. 아빠가 오늘 정말 아홉 시까지 자려나? 왜애? 어제 아빠가 그랬잖아. 오늘 월요일이니까 아홉 시까지 늦잠 잔다고. 그으으으....래? (얼음 박스 찾으며... 아드레날린 폭발!) 엄마, 제발... 그냥 조용히 자게 해 줘. (아, 우리 엄마 금쪽이지...) (안 들림)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엄청 큰 소리로 노래하기) 엄마, 하지마아... 아, 아... 말하지 말 걸... 금쪽이... 하지 말라.. 2023.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