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해보고 싶다.^^;;


채윤이 때문에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뮤지컬을 보는 기회가 한 두 번 생겼다.


현장에서, 무대 가까운 자리에서 배우들을 바라보노라면 누구라도 감동을 받지 않겠나?


그런데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어릴 적에 나를 잘 관찰해주고, 또 격려해주고, 내 재능을 찾아주고,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소개해 줬다면....그래서 아주 최적의 조건에서 내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도 뮤지컬배우를 해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무대 위의 배우를 바라보면서 '참 행복하겠다. 얼마나 신날까?' 하는 생각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나 정도면 '매우 높다'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의 일을 그다지 부러워해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지금처럼 잘 알게 된 것이 어쩌면 30대 이후인데...

누군들 나를 찾아주고, 내 꿈을 찾아줄 수 있었겠는가?

200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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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이 강의시간에 듣던 중에 '여자들이 죽으면 남자들이 너무 빨리 결혼한다'하는 논조의 얘기를 들었단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정신실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방에 틀어 박혀서 아무 것도 먹지 말고 있다가 굶어 죽어야지. 따라 죽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단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혼자 눈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2.

며칠 후 동생과 통화하다가,

아버지 돌아가시던 밤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았던 공포와 공황상태에 가까운 밤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버지의 죽음, 불을 환하게 켜놓고 아버지의 시신을 기다리며 장례식 준비를 하던 장로님들과 교인들의 분주함.

동생은 이 날 자기 집 같지 않아서 양말도 못 벗고 잤다고 했다.



얘기를 하다보니, 동생이나 나나 독특한 불안을 안고 사춘기를 보내고 지금까지 지나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엄마도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하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 늘 불안에 떨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 불안함을 정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한 동안 그렇게 기도했었다. 나는 동생보다 그래도 마음이 더 강한 것 같아서...'하나님! 엄마를 데려가시려거든 제발 동생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 다음에, 가족이 생겨서 마음 둘 곳, 위로 받을 곳이 있은 후에 데려가 주세요' 그런 기도를 간절하게 했었다.

어쨌든, 여전히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지고, 세상이 끝날 것만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직면하고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조금 나아졌지만 가끔 엄마 돌아가시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나를 공포에 몰아 넣는 학대를 할 때가 있다.


3.

아직 일곱 살 밖에 되지 않는 채윤이가, 아니 현승이 까지고 '죽음'을 생각한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자기들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상상을 하면서 울 때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아직 어린데 부모가 돌아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공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학기 초만 되면 '편부 편보 손 들어봐' 이런 담임선생님의 말에 얼마나 얼마나 크게 상처를 받았는지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기 때문에...

내가 아니어도 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서 키우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편과도 오래오래 같이 살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죽음으로 헤어진다는 것.

그래도 결국 잘 살게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그 아픈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진다는 것도 잘 알지만...ㅜㅜ

200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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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AP목장을 정말 사랑하고,

무엇보다 목장에 감사하는 이유가 있다.


청년시절부터 소그룹 리더로 섬겼지만 나는 스스로 그리 좋은 리더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과 다르지 않은 리더였을테지만,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리더였다.


그 증거는 틀어진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청년시절의 공동체를 통해서 내게는 두 세 건의 틀어진 관계가 있다.

그 당시 그 상황에 있을 때는 많은 우아한 표현들을 썼지만 단연코 마음으로부터 내가 거부하고 밀어냈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내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공동체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과거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과거가 없었다면 어쩌면 아직도 나는 그 수준에 있을 지 모르는 일이다.


그 틀어진 관계가 온 몸으로 느껴졌던 사건 이후에 나는 '영적파산'을 경험했다.

그 영적파산은 남편과 처음 교제후 헤어짐의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더욱 헤어나기 힘든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지옥같은 고통의 시절이었고, 철저하게 나의 악함과 약함을 직면해야 하는 시기였다.


관계의 문제는 어쩌면 '다름'의 문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도 다르게 지으셨을까? 어느 한 사람 온전히 나랑 같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관계 문제의 대부분은 '잘잘못'의 문제보다는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온 몸으로 배운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축복이고 은혜였다.


'다름'과 '다양성'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런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떤 관계는 답이 잘 안 나오고 껄끄럽고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어떤 관계의 문제에서든 나를 '무작정의 피해자'로 간주하며 일을 해결하려 하지는 않게 되었다.


나는 우리 AP목장 안에서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누구랄 것 없이 개성이 있고, 삶의 스타일이 다르고, 신앙의 방식도 다르지만....그 다름으로 인해서 많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 목장에서 내가 제일 언니인데 언니로 대접해주는 동생들로 인해서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는지 모르겠다.

'다름'이 잘 받아들여지는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 무엇보다 '다름'을 잘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 목장모임을 통해서 '다름'을 '감사'로 경험하게 하신 그 분의 뜻에 더 합당한 분별력과 받아들임과, 은혜로 살기를 기도한다.


일마다, 때마다 더 겸손하게 낮아지면서....

200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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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멀리는 고3때, 가깝게는 채윤이를 낳고도 결심했던 일이다.

결혼 전, 어느 여름 날.
남편은 장신대 도서관에서 신대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대학원 공부 중이었고 여름방학 때라서 같이 옆에서 같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느닷없이 기윤실에서 '와서 간사로 일해보지 않겠냐?'하는 제의가 있었고,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결혼을 시켜주지'하시는 부모님 말씀과 더불어 마지못해 신학도인 자신을 받아들이는 나를 염두에 두고 남편은 과감히 책가방을 쌌다. 기윤실로 가기로 결심하고 장신대 도서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나왔었다.

다시 남편은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남편의 의지가 강하다. 웬만한 일에 남편이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결심은 내가 웬만큼 방해공작을 해도 별 수 없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반대할 수도 없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처음엔 마음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금, 평신도로 교회 공동체를 섬기고 내 일을 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모'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목사의 아내 즉, 사모'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편이 드디어 자신의 소명을 향해서 주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있었던 사경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듯 했다.'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네 남편의 소명을 니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이제 그만 놓아라. 그만 붙들고 있으라니까'
결국 기쁨으로 남편을 지지해야지 결심했다. 그러나 내 맘에는 평안이 없었다. 슬프고 괴로왔다.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의 소명이라는 것 알겠어요. 남편이 사람들의 영적이 성장을 도우려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치고 아이디어가 많은 것 알겠어요.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제 마음에 평강으로 응답에 주세요. 제 마음에 평안이 없어요'

어느 주일 아침 예배에서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모로서 아직 세 살, 여섯 살 밖에 안 된 채윤이와 현승이의 독특한 성품을 이해하려 하고, 달란트를 발견하려 애쓰고 있다. 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언젠가는 찾아야 할 것이고 그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을 돕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부르시겠나. 내 성품도 무시하고 내 달란트도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자리로 나를 부르시겠나? 혹시 남편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 내가 지휘를 못하거나, 목녀로서 섬기지 못할 수도 있고, 교회 홈피에 자유롭게 글을 쓰는 일들을 못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뭐 내 정체성의 전부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보다 행복한 사역의 자리로 날 부르실 하나님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는 생각의 전환으로 이끄셨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내 '생각의 틀'을 바꿔주신 것 같았다. 또 굳이 남편 때문이 아니라 내가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일과 사람들이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졌다.
홍순관의 노래에 '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이라는 나레이션이 있는데 그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조율중이고, 대화중이고, 기도중이다. 이 일로 남편이 자신의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는 계기가 된 것도 감사하다. 물론 이 과정은 남편 자신에게나 내게나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남편의 소명과 꿈을 소중히, 정말 소중히 여기면서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통과해 나갈 것이다.

2005/07/04
우리 샬롬 찬양대에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분이 계셨습니다.
항간에는 이 분은 '연습 중에 화장실 가셔도 안 된다'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지휘자로서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소프라노에서 소리를 주도해서 내시는 분인데,
이 분이 처음으로 연습에 빠지신 날 정말 당황이 되었습니다. 소프라노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파트가 영향을 받기 시작해서 찬양대 소리가 전멸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실 뿐 아니라 영발도 끝내주는 분이라서 이런 저런 영향력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예전부터 속 깊은 얘기를 나누고 기도해주시던 분이라서 저 역시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지요.

이 분이 사경회를 앞두고 호주로 여행을 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경회 이튿 날 저녁에 우리 찬양대가 찬양을 드려야 하게 되었습니다. 딱히 말로 하지 않아도 이 분이 안 계신 상황에서 더 큰 무대로 가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문제였습니다. 주일 예배 찬양도 마찬가지이구요.

지휘자로 데뷔하고 1부 예배 외에 처음 다른 무대에 서는 건데....좀 그럴듯 하게 하고 싶은데...하는 욕심들을 빨리 내려 놓았습니다. '다른 대원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 무엇보다 찬양 받으실 하나님께서 그런 정도의 일로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최선을 다해 찬양을 준비하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일 입니까? 찬양 연습을 하는데 소프라노에서 기적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지난 주 모든 대원이 돌아가면서 솔로를 하고 난 다음이라 자신감이 생긴 터에 일당백 해야겠다는 책임감 까지 더해져서 모두들 기대 이상의 소리들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빠지면 소프라노 자체가 없어지는 듯 했었는데 당당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50이 넘으신 집사님이 연습이 끝나자 '머리가 띵하다. 쓰러질 듯 하다' 하실 정도로 열심히 찬양하셨습니다.
열심과 열정은 전염되기 마련. 다른 파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연습하면서 '이대로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예배에 그대로 가져 갔으면 좋겠다. 남은 음악적 연습 포기해도 좋다. 모든 걸 다 쏟아 넣어 찬양하는 이 모습 이대로 가져갔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거기다가...
너무 열심히 연습들을 하신 나머지 이 분들이 가사를 다 외워버리신 것입니다.(물론 한 번 했던 찬양이기도 했고 가사가 반복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50대로 구성된 찬양대 입니다. 이 분들이 당신들 입으로 먼저 '가사 보지 말고 그냥 외워서 합시다' 하는 것입니다. !!!!!!
"제가 외우자고 한 거 아녜요. 여러분이 하신 겁니다" 몇 번 확인을 했습니다. 물론 헷갈려서 버벅거리는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 완벽하게 외워서 당일 찬양을 드렸습니다.

토요일 사경회 저녁에 그렇게 찬양을 드리고 주일 아침에 만났습니다. 8시에 갔더니 담임 목사님 일찍 오셔서 대원들과 차를 들고 계셨습니다. "저희는요 일주일 쌓인 스트레스 주일 날 찬양대 와서 다 풉니다. 아마도 지휘자님이 은근히 음악치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면서 들떠 있었습니다.

주일 찬양이 짧은 가사가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이었는데 예배 들어가기 한 20분 전에 한 분이'다 외왔다. 이것도 고마 확 외워뿔지. 뭐~ 악보 뭐 보겠노. 쉬운데' 하시더니 결국 또 악보를 안 보고 부르시겠답니다.
"오늘도 외워서 부르면 교인들이 샬롬 찬양대 미쳤다고 해요. 어제 칭찬좀 받더니 밤새도록 가사 외웠네" 할거예요. 하면서 농담 반 했는데 결국 다시 악보를 보지 않고 찬양 드렸습니다.


두 번의 찬양을 통해서 내가 온 마음을 쏟은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꼭 노래 잘 하는 목소리가 아니어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있게 찬양하세요. 할 수 있습니다. 악보도 잘 못 보는 당신도 찬양이 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이상 할 수 있습니다. 자신있게 온 마음을 드리면 됩니다. 위축되지 마세요.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메세지를 눈과 표정으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메세지가 전달 되었고 이 분들은 음악적으로는 물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다른 경지의 찬양을 드리고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 샬롬 찬양대 안에 팽배한 '노래 못하는 사람들 모인 찬양대'라는 보이지 않는 의식들이 많이 씻겨졌다는 것입니다.

입 안이 다 부르트고 헤어져도 나는 살 맛이 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안에 숨겨진 장점을 발견하고 자신있게 발현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신에게 없는 것을 붙들고 위축돼 있던 한 사람이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었어? 내가 이런 존재였어? 내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깨닫는 순간 천국의 기쁨을 맛 보는 것.
주 중에 만나는 중증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자신 안에 가진 잠재력을 음악을 통해서 발현하면서 그 순간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그야말로 '정상화'를 경험하는 것.

그런 일을 할 때, 나는 정말 살 맛이 납니다.

200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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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찬양을 이렇게 드렸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하는 찬양을 가지고 전 대원이 돌아가면서 솔로를 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의 가사 중에서 한 문장씩 대원들에게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사랑을 설명하는 동사들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것' 또는 최근에 자신의 삶에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을 선택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부분에 자신의 고백을 담아서 불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솔로'라는 부담 때문에 대부분의 대원들이 손을 내젓고 고개를 숙이고 '나만 빼달라'하고 될듯 싶지가 않았습니다. 연세도 많은 분들이라 '내가 너무 어려운 요구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한 두 분이 자원을 해서 솔로 부분을 정하기 시작하자 결국 모든 분들이 기꺼이 하시더군요.

연습을 하는 동안에도 감동이 200배 였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각각 다른 음색으로 들리는 사랑을 설명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으로 파고들더군요. 대원들 대부분 '나는 노래를 못한다'라고 많이들 생각하시죠. 그런 겸손함 때문일까 어느 한 분의 소리도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솔로 부분에서는 음악적인 것을 거의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음정이 불안하면 불안한대로 박자를 해 먹고 가면 그러는 대로 부르시도록 했습니다. 한 분 한 분께 '당신의 노래는 최고 입니다'하는 무언의 메세지만을 계속 보냈습니다. 누구보다 지휘하는 제 자신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한 찬양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또 덕분에 대원들의 소리를 한 분씩 분명하게 들어볼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늘 '나는 노래를 못해'라고 하시는 분들이 솔로를 하시고 나서 자신감을 가지시는 모습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찬양을 마치고 티타임 시간에 대원들끼리 흥분의 도가니탕이셨습니다. '내 30년 성가대 생활 동안 이런 방식은 첨이다. 지휘자가 완전히 모험을 한 것이다. 모험에 성공한 것이다' 하시며....

처음 찬양대를 맡으며 내 마음이 얼마나 높은데 있었고 교만했었는지를 돌이켜 보게 됩니다. 주일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본당에 들어가면 이미 여러 분의 찬양대원들이 구석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처음 그 모습을 보고는 감동이 되어 가슴이 두근거렸었습니다.
샬롬 찬양대를 섬기면서 '찬양 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배우는 것 같습니다. 은혜가 너무 큽니다..

200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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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로 돌아왔습니다.
전공도 아니고 주업도 아니면서 최근 얼마 동안 어찌나 지휘가 하고 싶었는지...
지휘 하기로 결정된 날은 밤잠을 다 설쳤습니다.^^;;;

오랫만에 주일 아침 찬바람 맞으며 버스를 타고 혼자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동안 연습을 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내게 찬양을 가르치신 분은 가장 먼저 우리 엄마입니다. 사모님이셨던 엄마는 교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날 안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자장가로 부르셨죠. 때로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하는 군가 분위기로 재우기도 했었던 것 같고...
음정 박자 엉망이지만 찬송 한 절 한 절에 눈물과 사랑과 소망을 그대로 담아 부르셨기 때문에 어떤 찬송들은 아직까지도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엄마로부터 배운 대표적인 곡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이 다음 주 부를 데뷔 첫 곡입니다. 여든을 넘기고 주님 나라를 바라보시는 우리 엄마. 엄마는 그 인생의 길을 이렇게 달려 오도록 주님 안에 있는 긍휼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 오셨죠.요즘은 엄마의 달려온 길로 인해 눈물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 유난히 이 찬양이 가슴으로 불러지죠.

처음 배웠던 찬양으로 처음 찬양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찬송가 그대로 찬양하려고 합니다.

한동안 홈피가 조용했던 것은 성가대 첫 연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선곡을 하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보면 쿵쾅쿵쾅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릴 만큼 설레이고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성가대원들 주소록을 보니.....44년생, 47년생도 허다하시고 50년대 생은 젊은 분들 이십니다.
그럼에도 지휘자를 바라보는 눈망울이 초등부 성가대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분들이 있어서 힘이 되었습니다. 악보를 볼 줄 아는 분은 각 파트에 한, 두 분!^^
남편한테 '나 성가대 하다가 잘 안되면 교회 옮기자. 도망가는 거야' 하고 포석을 깔아놨습니다.

주일 아침 이제 두 아이 챙겨서 나와야 하는 김종필씨의 외조가 없으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할 수가 없죠. 또 우리 현승이 하루에도 몇 번씩 '킁엄마 킁엄마'하고 찾아대는 권순경큰엄마를 비롯한 유아실 봉사하시는 분들 계셔서 할 수 있는 일이구요.

오랫만에 성가대를 준비하다보니 전도사님과 정신언니 생각이 제일 많이 났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전도사님과 정신언니와 함께 찬양했던 그 시절로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사는데....유난히 생각이 많이 나대요.

미스코리아 당선소감 발표하는 거 같죠?^^;;

200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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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자가 아무리 훌륭하고 씨가 아무리 좋아도 작황을 결정짓는 것은 '토양의 상태'이다.
지난 세월 무수한 씨앗이 내 마음에 내려앉았을 것이고 무수한 씨앗이 거기 죽었을 것이다.

1. 마음의 경직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편식성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 정말 맞는 통찰인 것 같다. 같은 예수를 믿는데도 그렇게도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말씀을 듣되(말씀이 꼭 설교나 큐티를 통한 묵상이 아니어도....일상을 통해 들리는 모든 소리) 편식을 하는 문제로 내 마음의 토양이 피폐해져가는 것 같다. 그래서 편식의 세월이 오래될수록, 즉, 나이를 많이 먹을수록 말이 안 통하고 진리가 흘러들어갈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말씀 묵상을 하면서도 두렵고 떠림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 '편식' 인 것 같다. 부디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 나이들었으면 좋겠다. 마음의 귀가 넓게 열려 일상에서 들리는 말씀을 고루고루 잘 들으면서 내 마음의 토양을 가꿨으면 좋겠다.

2. 씨앗을 받아 풍성한 수확을 내려면 땅을 갈아야하고, 흙덩이를 부수어야 하고, 성장을 저해하는 숨을 돌멩이를 하나하나 제거해야 하며, 양분을 빼앗는 잡초를 일일이 뽑아 내야 한다.
부단히 내 두 번째 마음을 돌아보는 것. 사람들에게 '내 마음이야'라고 말하는 환경미화용 마음이 아니라 숨은 진짜 마음. 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부단히 회개하고 고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내 마음의 토양을 갈고, 돌멩이를 제거하는 과정의 전제일지 모르겠다. 멈출 수 없는 작업이다. 풍성한 수확을 내기위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3. 과실에 필요한 무기물을 공급하려면 토양 내부와 주변의 어떤 것들은 목숨을 바쳐야 한다. 토양을 비옥케 하는 분해된 유기물을 '부식토(humus)'라고 한다. '겸손(humility)'이라는 말도 그것과 상관이 있다. 겸손이란 '낮아진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이다. 그 분은 우리를 낮추신다. 직접 밑바닥에 데려다 놓으실 때도 있다.
두 번째 마음을 가끔씩 돌아다 보고 회개하는 과정이 없이 나 자신에게 속는 날이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이 직접 밑바박에 내려 놓으시는 날이 있을 것이다. '겸소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친구와 가족과 공동체를 동원해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시며 마음의 쓰레게들을 크게 정리하실 날이 있을 것이다. 때로 그런 사랑으로 다가오실 날에도 멍청하게 나자빠져 있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마음에 들려오는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

내 삶의 진정한 목표는 내 마음의 토양을 가꿔서 끊임없이 그 분의 말씀을 잘 받아내고 가꿔서 수확을 내는 것. 그 수확이 풍성할 때 내가 행복해지고, 내 가족이 행복해지고, 나를 아는 이웃이 행복해지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 땅의 어떤 약한 자가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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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글씨는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에서 발췌.

200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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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문>

혹 식사를 하신 지 얼마되지 않으신 분이나 원래 속이 좋지 않으신 분은 다음 글을 읽는데 주의를 요합니다. 내용이 느끼해서 속이 심히 울렁거리 수 있겠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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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남편은 3부예배(청년예배)를 드린다.
주일 2부에 채윤이는 유치부로 현뜽은 유아실에 맡기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드리는 예배는....
둘이 함께라서 더욱 감사하고 행복한 예배가 된다.

남편이 청년부를 섬기기로 했다.
2부 예배 시간에 청년부 아이들을 데리고 기독교세계관 스터디를 하게 된다.
자연스레 우리는 각각 2부와 3부 예배를 따로따로 드리게 되었다.

남편이 3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아이들을 봤다. 예전에 많은 선배 아기 엄마들이 그렇게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을 봐왔었다. 어느 새 내가 그런 자리에 있었다.

예배가 끝날 즈음 유아실 유리문으로 본당 끝 쪽에서 예배 드리는 남편의 모습을 오래 쳐다보았다.
두 손을 펼쳐 들고 찬양 드리는데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닭살?ㅋㅋㅋㅋ)
펼쳐 든 남편의 손이 클로즈업 되어 눈에 들어온다. 손바닥이 넓고 손가락은 짧은 두툼한 손.
나는 원래 관심 있는 남자의 손을 주시하는 버릇이 있는데 예전에 본 남편의 손은 딱 내가 좋아하는 손이었다. 그 손으로 찬양 시간에 기타 반주를 하면 참 멋이 있었다.(거의 쓰러질 정도로...또 닭살?ㅋㅋㅋ)
남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예전 3청 때의 모습이 많이 생각났다. 참 멋있는 후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인지는 몰랐었다. 그 때는 정말 보이는 아주 작은 모습에 매력을 느꼈을 뿐이었다. 결혼해서 보니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몇 개월 안되서부터 내가 유치부를 섬기게 되었었다. 지도교사라고 말하자면 평신도가 전도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당시 고등부를 섬기고 있었는데 채윤이를 낳고나서 기꺼이 고등부 봉사를 접고 나로 하여금 계속 유치부를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남편 일생에 그렇게 길게 교회봉사를 쉬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기꺼이 그렇게 해 주었다.
이제 청년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나누고 가르치는 일로 봉사를 다시 시작한다. 3부 예배 드리는 동안 남편을 기다리면서 감사했다. 나도 남편의 봉사를 위해서 아이들을 돌보며 기다려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그리고 또 감사했다. 내가 대견스러웠다.
어쩌면 그 시절에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확실했을까?
어찌 저렇게 좋은 남편을 선택하는 눈이 내게 있었단 말인가?ㅎㅎㅎ

2004/10/25

내 나이 스물 일곱 되던 해 2월.
나는 그 2월을 불안에 떨며 울며 불며 지냈다.
그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은 폴투르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

4년간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 두고 분당에 있는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했었다. 월급 더 올려줄테니 그만두지 말라고 설득에 설득을 하던 원장선생님이 소개한 유치원이었다. 2월 중순, 가르치던 아이들 졸업시키고 새로운 유치원으로 가서 원장님을 만났던 자리.
'이번 주일에 교사 엠티 갑니다. 다들 교회 다니는데 1부 예배 드리고 갑니다. 시간 되죠?'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니요!' 하고는 그럴 수 없는 나만의 소신을 밝히고 새로 사람을 구하시라 하고는 나왔다. 이미 교사채용이 다 끝난 2월 말에 더 이상 유치원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집 생활비의 절대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고 난 다음 밤마다 불안해서 울었다. 내년 2월까지 기다려야 제대로 된 유치원에 갈 수 있는데...
1년 동안 어떡하나? 엄마한테 미안해서 어쩌나? <모험으로 사는 인생> 읽으면서 감사함으로 또 울었다. 암튼, 2월 마지막주 한 주 동안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 섭외가 막 들어왔다. 당장 그 다음 달 3월 한 달 수입이 유치원교사 월급의 두 배 보다도 많았다. 그로 인해, 대학원 공부도 꿈꿀 수 있었고 나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 직장을 그만두고도 불안함이 없었다.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좀 신경 쓰이는 정도였다. 그리고 욕심도 없었다.

음악치료 파트는 아직 그리 많지 않았고 있다하더라고 페이가 약하다.
달크로즈 하기로 하고 알아보니 적잖은 아이들이 모아질 것 같았다. 망설이던 엄마들 수업 한 번만 보여주면 그 자리에서 하기로 결정을 했다.내가 명색이 음악치료산데 안 할 수는 없고 환경미화로 하루만 하고 나머지 날은 달크로즈만 하기로 했다.

지난 주에 별 기대 없이 파트 음악치료사 구하는데 이력서를 넣었다. 이미 달크로즈 만으로도 내가 짤라야할 형편이라 배짱 튕기면서 인터뷰 갔다. 이게 웬일인가? 원장의 치료에 대한 생각이 나랑 너무 비슷하다. 내 이력과 얼굴을 보면서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근무조건이 딱이다. 무엇보다 산본에 있는 것이어서 일주일에 두 번 (또 다른 하루 짜리 파트를 합하면 일주일에 세 번) 남편과 함께 퇴근할 수 있다.

어찌나 감사한지....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직장 그만두고 한 달 사이에 너무 적절하게 음악치료 하고 또 그리도 바라던 비장애 아이들 데리고 하는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 오전 시간 집에서 보내고 오후에만 일하면서도 적정 수준의 수입을 낼 수 있게 되었고다. 달크로즈 해달라고 줄 서 있던 엄마들 배 내밀고 짤라버리고...ㅎㅎㅎ

이제는 정말 일이 이렇게 잘 되는 것만을 가지고 좋지는 않다. 진심으로 이것 때문만으로 기뻐하지는 않게 되었다. 이렇지 않은 날에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지 오래다. 그래도 감사하다. 이렇게 예비하시는 그 분의 손길...

200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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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사표를 냈습니다.

이 직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 채윤이 낳고 산후조리 중이었습니다. 출산하고 삼칠일에 면접 보고 5주 만에 입사해서 출근을 하게 되었죠. 제가 음악치료 대학원 2기 이기는 하지만 당시(지금도 마찬가지고) 풀타임 음악치료사 뽑는 곳이 드물어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는 출근을 했습니다.

입사 후 한동안은 (요즘도 가끔은) 점심시간 식당에서 식사기도를 할 때 저는 '하나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일할 곳을 주시다니요....'하고 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이 직장에서 일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유난스레 하나님께서는 내게 특혜를 많이 주신다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만 다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자신의 마음의 소리도 그렇고, 복지관의 정황도 그렇고, 몇몇 관계들이 그렇고.....

지지난 주일 예배 설교가 다니엘서 1장 8절이었는데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거룩해야 한다' '믿음으로 모험을 해야한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모험이라? 나한테 하시는 말씀인가?'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도 서두르지는 말자. 확신 주실 때까지 기다리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주 남편과 둘이 여행 갔을 때 이런 저런 얘기 끝에 8월 정도까지만 다니기로 허락을(?) 받았습니다.그러고 나서도 마음이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아, 글쎄! 지난 주일 목자모임 시간에 남편과 간증을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정신실 목녀는 지금 직장을 8월 정도까지만 다닌다고 합니다. 기도해 주십시오'하고 광고를 하시는 겁니다. '어라? 목사님 요즘 기도 많이 하신다더니 영빨 디게 세지셨네. 아무한테도 얘기를 '하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바로 전 점심시간에 남편이 얘길 했더구만요.ㅜㅜ
이제 갈등은 끝이 난 거죠. 광고를 해버렸으니....사표를 내야지.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교회 김낙춘 목사님이 나의 굵직한 인생의 전환기 때마다 슬쩍 개입을 하시게 되는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늘 만날 때마다 근황을 물으시고 귀기울여 들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자쥐 뵙는 것도 아닌데두요. 한참 여성학과로 대학원 준비하고 있을 적. 음악치료 대학원이 생겼다는 얘길 듣고 평소 관심 있어하던 교회 후배한테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는데요. 친구 명선이가 '니가 하면 좋겠다'하더니 함께 계셨던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시면서 해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음악치료 대학원에 가게 됐었죠.

암튼, 이렇게 또 다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사직 이후. 그러나 마음은 평안 합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아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명명백백하게 볼 수 있을테니까요.

기도해 주세요~ 여러분!

200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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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하덕규씨가 신앙이 좋아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왜냐?
하덕규씨가 회심하기 전 노래도 좋아했고, 막 회심했을 때 만든 노래들도 참 좋다.

'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외롭고 외롭던 숲
음~ 내 젊은 날의 눈물 고인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어둡고 어둡던 숲
음~ 내 어린 날의 숲'

'당신이 쌓은 벽과 내가 쌓은 벽 사이에 꽃 한 송이 피어나고
당신이 지난 날고 내가 지나온 날들이 그 꽃 위에 바람처럼 불고
당신의 고운 눈가에 이슬처럼 눈물이 내 파리한 이마 위에도 굵은 땀방울이
그 애처로운 꽃잎 위에 촉촉하게 내리고 - 촉촉하게
당신이 쌓은 벽과 내가 쌓은 벽 사이에 그 꽃이 바람에 꽃씨를 날릴 때, 그 때
당신이 만든 창과 내가 만든 창문 사이 그 꽃이 가득 피어 아름다운 꽃밭 될 때, 그 때'

이런 가사들은 그 아름다운 언어 만으로도 천국의 노래 같이 느껴진다. 게다가 자세히 가사를 들여다보면 이건 정말 천국의 노래다. 어떤 때, 나는 이 노래들로 복음성가나 찬송가에 지나는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노골적인 단어 하나 없이 저렇게 천국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니....
깔끔하고 세련된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하덕규씨만의 목소리. 참 좋았다.

하덕규씨는 명성교회 집사님이다. 회심한 이후에 날로 믿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이후의 음반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 이후의 음반들을 나는 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하덕규만의 가사들이 나오질 않는 것에 대해서 혼자서 개인적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사람들이 신기루를 찾네....여기 있다 저기 있다.............'이런 가사로 시작해서 훨씬 더 노골적인 가사들 많다.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한다.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으로 그 기쁨을 드러내고 싶지 않겠나? (그러면 그냥 CCM음반 따로 내고, 예전처럼도 하고 그러지....ㅜㅜ)

내 이름 얘기를 하려다가 딴 얘기가 길어졌다.
어렸을 때는 어디가나 '너 어느 교회 목사님 딸이지?'하는 말 속에서 '신실'이란 이름이 부적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가 목사 딸인 것도 알고 그래서 이름이 뭔가 노골적이란 것도 알았으니까.
고등학교 때 쯤에는 내 이름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면 내 이름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심지어 '나중에 결혼해서 딸 낳으면 내 이름을 그대로 물려줘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다.

언제부턴가 내 이름이 불편한다. 일단 발음하기도 어렵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진실' 내지는 '성실'이라고 바꿔부르기도 하고....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까지 바꿔서 '최진실'이라고 부른다.(아무리 얼굴이 비슷하기도서니.....ㅎㅎㅎ)
더 불편한 건 내 이름에서 풍겨나는 '노골적인 냄새' 이것이다. 대놓고 '사무엘' 이나 '에스더' 이런 이름보다야 훨씬 덜 노골적이지만서도. 어릴 적에는 내가 사는 세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다. 어른이 되어보니 내가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세상' 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결국 나의 선교지였는데 나는 어딜 가나 '정신실입니다' 하는 순간 내 정체성을 들켜 버리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람 참 좋아. 제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야.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 아니야. 의식있는 사람이지......아!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어?  크리스챤 중에도 저런 사람이 있네 그려~' 이런 시나리오 자체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노골적인 이름. 그거 별로 안 좋은 거 같다. 최근에 '예순이'라는 이름까지 봤다. 너무 한 거 아닌가?^^

200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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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음치, 막치, 몸치를 삼치라 하는데...

나는 나 자신을 이 삼치 중 몸치라 칭한다.
보시는 바와 같이 몸치가 저런 옷을 입고 저런 무대에서 저런 공연을 하다뉘....

그런데 나는 몸치 중에서 몸을 안 아끼는 몸치다.
내 비록 몸치이기는 하나 열심히 한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

저 군무를 가르치신 선생님이 내가 엄청 열심히 하니까 잘 아는 줄 아셨나보다.
세상에나 나를 네 명이 앞에 나와서 하는 노래로 말하면 사중창에 뽑아주신 것이다.
일단 뽑아놓고 나중에 공연이 임박하니까 후회하는 것 같았다.ㅋㅋㅋ
'저렇게 뻣뻣하다뉘....'하면서.

이번 학기 달크로즈 강의를 들으면서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이것이다.
내 자신 몸치임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 사실 원래도 크게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하질 못했었다. 이젠 열심히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하니까 재미도 있다.

공연을 보러 오신 부모님이 어떻게 보셨을까?
몸은 뻣뻣한데 너무 열심히 하는 며느리가 민망하진 않으셨을까?
남편 역시 별다른 평을 안 해준다.

몸치는 이 뻣뻣한 몸에 날개를 달고 유연하게 날고 시프다....

200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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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노조다  (0) 2007.07.07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목장모임에 가서 나누지 않았다.
김종필이 인정하는 진솔한 나눔의 선수인 정신실이 나눔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었다.
맘에 맞아서 위로가 되던 목장에서 분가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조금 다친 후로 그렇게 마음을 닫아 버렸다.
나눠야 할 기쁜 일 또는 기도제목이 있을 때마다 나는 결심했다.
'이건 목장모임에 가서 결코 나누지 않을거야. 오늘 목장모임에서 나는 반드시 이건 나누지 않을거야' 하고 말이다.

당연히 목장 공동체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이 기대가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당신들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나는 그렇게 마음 먹었던 내 마음 까지 다 드러내고 나눴다. 제한적인 나눔을 하는 틀은 나눔의 원칙을 많이 얘기하는 것 보다 그냥 누군가가 확 나눠버리는 것이 지름길 이라는 것을 안다.
오랫만에 우리 목장의 '나눔' 자체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나눔이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서 분분할 때, '지금이야! 용기를 내! 너의 얘기를 해!' 라고 누군가 재촉하는 것 같았다.
힘겨웠던 지난 일주일과 그간 나누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혼자 뻐팅기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나를 그렇게 드러내서 나누는 일은 일종의 망가지는 방식인 것 같다. 우아하기로 맘 먹고 고상하기로 맘 먹으면 쉬 되기가 어려운. 그래서 나를 그렇게 보이고 나면 '나를 판단해 주시오' 하고 칼자루를 여러 사람에게 준 것이 되기 때문에 두렵기도 한 것 같다. 내게 우호적이진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드러내기는 더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렇게 나눌 수 있음은, 이미 성령님께서 내 문제에 개입하고 계셔서 해결에 착수하셨다는 것임을 오늘 고백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전혀 그럴 생각으로 모임에 간 것이 아닌데 그렇게 나누고 있는 그 순간 나를 옥죄던 것들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나를 빡시게 만지셔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주일을 주셨나보다.
2004/05/15
        
함영심 잘했다...쉽지 않았을텐데...성령님이 함께 하셨으니 가능했겠지?^^ 남들이 칼자루를 쥐고 흔들던 어쩌던 그건 주님께 맡겨야지 (04.05.15 02:09) 댓글삭제
함영심 그치? 누군가 그러더라. 비난은 비난하는 사람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나도 쉽지 않지만 타인의 판단과 비난에서 자유로 (04.05.15 02:10) 댓글삭제
함영심 워지려고...신실이네 목장 앞으로 눈물바다 되는거 아냐??^^ (04.05.15 02:11) 댓글삭제
조혜연 그러게....아무쪼록 이번 기회를 통해 다드림의 나눔이 더욱 진솔해지고 풍성해지길,,기도합니다! (04.05.15 21:32) 댓글삭제
김종하 나눔..특히 자기 상처에 대한 나눔은 다른 사람들에게 간혹 용기를 주곤 하죠..ㅋㅋㅋ (04.05.19 17:50) 댓글삭제
권순경 목장모임에 드러내 놓은 나눔으로 인해서 답답했던 나의 맘이 풀렸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내안에 나를 드러내지 (04.05.22 11:00) 댓글삭제
권순경 않는다면 어쩔수 없는 철저한 베일에 가릴수 밖게 없겠지요.. 나눔을 통해 주님께 치료받는 목장이 되길소망한답니다...^^ (04.05.22 11:02)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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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친정) 현관 앞에 쭈~욱 놓인 화분 중에 고추가 심겨진 화분이 네 개.
오늘 들며 나며 그것이 고춘지 뭔지 관심도 없었다.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오는 길에 엄마가 자랑스럽게 '야! 고추 심은 거 볼래?' 이러시면서 소매를 잡아 끄셨다.
(목소리를 낮추고)'저 밑이 집이 고추를 나보다 먼저 심었거든. 봐라! 이거랑 한 번'
아닌게 아니라 네 개의 고추가 꼿꼿하게 통통하게 뭔가 당당하게 자라고 있었고 아래층 고추는 시들시들 힘이 없어보였다.

'내가 말이다....새벽기도 갔다 올 때마다 이거 붙들고 사랑헙니다. 잘 자라유. 열매 많이 맺어유 이러거든. 확실히 달러~ 야!' 하신다.

우리 엄마는 이런 사람이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가 엄마의 취미이자 특기. 우리 학창시절부터 1년에 두 달, 즉 3월과 9월 학기가 시작되는 달에는 철야기도를 하시며 우리의 학교생활을 도우셨다. 나나 동생이 조금만 아프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가 기도 안 혀서 그렇다. 내가 누구 마음 아프게 해서 니들이 받는 것이다' 하면서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시는 분이다.
그리고 작은 식물 하나에도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줄 아신다. 죽어가는 벤쟈민 화분을 쓰다듬고 붙들고 기도해서 살리신 울엄마다.

시골교회 사모님으로 전 삶을 다해 성도들을 섬기는 모습들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내가 자라던 시골교회 목사관에는 꽃밭이 잘 꾸며져 있었다. 거기에는 특이하게 무화과 나무가 있었다. 내게는 매우 자랑스러운 나무였다. 오직 우리집에만 그게 있었기 때문에 감나무 포도나무 이런거에 비교가 안 되는 희소성으로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뿐 아니라 목사님이신 아버지에게도 꽤 사랑을 받는 나무였다. 남다른 정성으로 기르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그 나무에 무성하던 잎이 하나도 없이 삐죽이 가지만 앙상한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잎들이 다 솥에 담겨서 삶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애긴즉슨, 성도 중 누가 아픈데 무화과 잎 끓여 먹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간에 무화과 나무를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는지 그것은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그 무엇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하랴? 아마도 부모님 생각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무화과는 시들어 버리고 다시는 열매도 잎도 보지 못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것 같은데 기억이 생생하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부모님의 마음이 그 분들의 말 없는 행동으로 충분히 내 어린 마음을 적셨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저 고춧대를 보면서 문득 그 무화과 나무 생각이 났다. 기도 밖에 모르는 엄마. 노인이 되면 고집이 세진다는데 날이 갈수록 더 부드러워지고, 더 마음이 넓어지시고, 도통 화내고 미워할 줄을 모르는 엄마. 팔순의 연세에 유머를 아는 엄마. 바로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아주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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