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인심 난나고. 김치통이 가득 차니 넉넉한 마음으로 요리를 하게 된다. 김치통이 가득 찼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제천에 다녀왔다는 뜻이다. 이 즈음 제천 민이네 갔다 오면 김치통이 가득 차고, 냉장고 야채 박스는 내가 좋아하는 3종 세트(호박잎과 고추와 호박)로 넘친다. 바쁘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도 뭣도 빈곤하고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뭘 해 먹이질 못했다. 집에 입시생 둘이 있는데, 이 둘을 잘 먹이질 못했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 통화하며 "현승아, 집에 먹을 게 없었는데 저녁 어떻게 했어?" 했더니 편의점에서 메뉴로 잘 먹었다고. 아, 죄책감이 밀려오…진 않지만 미안함과 고마움에 가슴이 저릿하다. 채윤에게도 같은 마음.레슨 갔다 또 연습하고 밤늦게 들어올 채윤이 점심 든든하게 먹으라고 김치찜을 한다. 오전 10시, 식사 준비하긴 애매한 시간에 김치찜을 안쳤다. 친구가 준 김치, 어느 집사님께서 손수 말리고 갈아서 만들어주신 생강가루가 고맙다. 한소끔 끓었을 때 전에 횡성 어느 두부전골 집에서 산 고춧가루 한 스푼 듬뿍 넣으면 그렇게 칼칼할 수가 없다. 빈곤했던 마음에 무엇이 주입되었는지, 많은 것이 감사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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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참 좋아하고, 선생님들을 좋아하며 존경하는 현승이가 '선물'을 요구한다. 지난 스승의 날부터 선생님 몇 분을 꼽으며 선물을 준비해 달란다. 현승이가 이러는 경우는 "찐"이라, 정성 담아 준비했었다. 추석 앞두고, 수시 원서 접수 앞두고 고3 현승이의 선생님을 뵈었다. 제 성향과 달라서, 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계셔서 더욱 선망하는 것 같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청소년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의미가 발견되어야 공부도, 뭣도 하는 아이인데 그 '의미'를 찾아가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 주시니 가끔 질투가 나도록 감사하다. (언젠가 학교 자랑 포스팅을 한 번 해야겠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런 선생님이 한두 분이 아니니.) LA 갈비를 사서 양념을 했다. 요즘 우리 먹을 음식도 잘하지 안(못)하는데, 전날 학교 수업 마치고 11시에 집에 왔는데, 기쁘게 무리를 했다.   

 

함께 하고 있는 연구소는 직장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직장이라고 치면 악덕 업체다. 열정 페이, 헌신 페이로 제대로 받는 것 없이 쏟아붓는 시간과 재능은 어마어마 하니까. 상담, 강의, 여러 세미나 진행은 거의 재능 기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함께 연구하고 성장하고 노는 게 좋고, 연결되는 이들을 돕는 게 기쁨이니 공동체이다. 그래도, 그래서... 두 번 명절에는 심사숙고하여 선물 하나를 잘하려고 한다. 실용적이고 정성 담긴 선물을 하려고 매 명절마다 행복한 고민을 한다. 제한된 재정으로 좋은 선물 고르기 위해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것이 기쁨이다. 이번 추석에는 LA 갈비를 전했다. 맛있게 딱 한 끼 먹을 분량이다. 일단 우리 가족이 한 번에 딱 맛있게 먹어 치웠다. 만족이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참 잘 만든 광고 카피들이 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 같은 추석 선물로 마음이 풍성하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이 양방향으로 채워져서. 

 

* 그리고... 물가가 비싸도 너무나 비싼 이 시절에 목사라고 작가님, 선생님이라고 추석 선물 주시는 분들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먹고 누릴 때마다 얼굴을 떠올리는 기도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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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현상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는 것. 은총. 선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요할 수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노력과 애씀으로 신비 현상을 얻어내려는 것 자체가 문제. 신비현상 자체가 문제가 아님. 신비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왜곡된 영성 생활을 하다 잘못된 사람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다. 현재에도 있다.

버섯전골 사진 걸어놓고 붙이는 인용문으로 뜬금없긴 한데... 이번 학기 듣는 [영성 신학의 주제별 심화] 수업 첫 시간에 필기해놓은 대목이다. 신비현상에 대한 분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분별 "어렵찌 않아요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 교과서였던 [신비 신학]의 저자 윌리엄 존스톤은 신비 신학은 "사랑학"이라고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못 이겨 사랑으로 주는 것이 (모든 신비체험 포함) 은사이다. 뭘 해서 보상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물이다. 내내 마음에서 은총, 선물이란 단어가 떠나질 않는다.

선물로 온 버섯과 색깔 고운 국수다. 선물이다. 주일 오후 남편이 다른 교회 설교에 초대받아 갔다. 오후 네 시나 되어 집에 왔는데 점심도 못 먹은 상태. 저녁 메뉴로 '버섯 국수 전골' 하기로 하고 아이들도 기대하고 있는데, 설교를 세 번 한 배고픈 목사를 위해 빨리 끓여 보았다. "엄마 아빠 먼저 먹어도 돼?" 단톡에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애들은 집에 와서 자장면 시켜먹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남편은 배고팠다 치고. 와~아씨,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4인분 생각하고 끓인 걸 둘이 싹 비워 버렸다. 배 부르고 몸이 뜨끈하고 영혼까지 채워진 느낌. 맛있게 뚝딱 먹어 치운 남편이 기분이 좋은지 고백을 해왔다. "여보, 사실 나... 나 버섯전골 좋아해. 나는 전골류를 좋아하는 것 같애." 아니 좋으면 전골한테 직접 고백할 일이지 그 사이에 왜 나를 끼워? 둘이 예쁜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건 참 좋은 일이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있는 것 아무거나 대충 먹는 당신이 안타까웠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건 정말 좋은 일 같아,라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물, 그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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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현승이가 금요일에는 야자를 쉬겠다고. 야자를 안 하는 건 좋은데 저녁을 챙겨야 하네. 짜파구리 해줘 봄. 채끝살 대신 부챗살 구워서 올려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짜파게티에는 파김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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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더스 양념 고기들은 가격이 싸고 맛도 저렴하다. 저렴한 양념 고기를 가져다 고유하고 특별한 요리로 만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 놀이가 작은 기쁨이다. 양념 고기 중 가장 싼 목살 양념으로 일명 "갈릭 포크 덮밥"을 만들었다. 현승이를 감동시켰다,라고 생각하지만. 현승이는 엄마에게 길들여져 맛이 있든 없든(대부분 음식이 약간의 맛은 있다!) 자동 반응을 장착하고 있다. "우와, 엄마 대박인데! 마늘향이 강하니까 정말 좋다." 현승이는 고기를 참 좋아하고, 덮밥도 좋아하기 때문에 자동 반사 반응이긴 하지만, 진심이 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념 목살도 목살이지만, 갈릭을 처리해야 했다. 통마늘 사두고 미국 갔다 왔더니 꽤 많이 남아 있는데 미끌미끌 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더 두면 못 먹지 싶고, 깨끗하게 씻어서 약간 말려서는 굴소스 등의 양념으로 고기와 함께 구웠다. 고기 반, 마늘 반. 안 맛있을 수가 없지!


저녁 먹고 들어온 JP가 "와, 나도 덮밥 좋아하는데..." 하며 소심하게 부러움과 '먹고 싶음'을 표현. 다음 날 도시락으로 싸줬다. 마침 마늘도 딱 필요한 만큼 남아 있었고. 내색은 안 하지만 좋아서 콧구멍이 벌렁벌렁. 고기와 마늘은 어떻게 따로 데워야 하는지, 먹는 방법 자세히 설명하고 제대로 먹었는지 인증샷 보내라고 했다. 오, 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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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 알바생과 고3의 토요일 아침은 행복하다.

늘어지게 자는 늦잠으로 행복하다.

행복에 플러스 해주려고 베이글 샌드위치를 해주었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편의점 가서 사 온 2+1 커피우유와 함께 주었다.

느리게 먹고 남매의 식탁 수다가 '영화'를 주제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늦잠 자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의 느린 수다가 이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네.

책을 봐야 하는데, 귀가 자꾸 식탁 쪽으로 커지고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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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아이들이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흰쌀밥에 소고기 미역국이다.
"와아, 흰쌀밥이다!"
흥부네 아이들처럼 우리 집 아이들도 좋아한다.
현미, 귀리, 보리, 흑미... 시커멓고 거칠거칠한 밥만 먹다 이렇듯 흰쌀밥이면.

아빠 생일 덕에 얻어먹는다.
생일엔 흰쌀밥에 미역국이지!

대학원 수업 마치고 10시 넘어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더니
깊은 밤 온 집안에 미역과 참기름과 소고기 육수가 어우러진 향으로 가득이다.
흥부네, 아니고 종필네 두 아이는...
한 녀석은 잠을 설친다. "아, 먹고 싶다! 지금 먹고 싶다!"
또 한 녀석은 "잠을 푹 잘 수 있겠다. 내일 아침 미역국 먹을 생각하고 잠들면 행복하게 금방 잠들어."

"아빠, 태어나줘서 고마워."
아빠 생일 덕에 종필네 아이들은 행복하다.
흰쌀밥에 소고기 미역국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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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점심으로 미역국 라면을 선택했다. 현승이 생일 미역국이 한 그릇 남아 있어서 라면 하나를 넣어서 끓였다. 미역국 좋아하고, 라면도 어쩌다 한 번은 꼭 복용해줘야 하는 것이니 딱 좋은 조합이다. 이 메뉴는 내게 약간 로맨틱한 맛인데, 드라마 <멜로가 체질> 때문이다. 이게 현승이 인생 드라마라서 내가 이렇게 가볍게 왈가왈부하는 걸 알면 싫어할 테지만. 내겐 인생 드라마까진 아니지만 심심할 때 짤이라도 찾아서 자꾸 보게 되는 드라마다. 무엇보다 대사가 찰져서 아주 귀를 쫑긋 하게 되었었는데. 손 감독 역의 안재홍과 진주 작가 역의 천우희 티키타카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모두 받아 적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추천하는 건 아니다. 완전 내 취향일 뿐이다.) 손 감독 캐릭터 너무 좋은데,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파 떡볶이를 만들거나 먹는 것, 정말 최애! 그래서 만들어봤다. 미역국 라면. 만들어 먹으면서 오랜만에 넋을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다시 보기'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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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헴, 쿨럭쿨럭... 저기... 애들도 없는데... 모처럼... 쿨럭쿨럭... 오랜만에... 에헴... 떡볶이나 해 먹을까?
좋지! 떡볶이. 내가 원하는 바로 그거!

애들 없을 때 늙어가는 부부가 딱 먹기 좋은 게 떡볶이다. 애들은 싫어한다. 된장찌개 끓여줘, 갈비탕 없어? 이러지. 그래서 해 먹었다. 삶은 계란에 콩나물 사리 추가, 국물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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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복 셰프가 알려준 그대로 고추잡채를 해봤다. 이제껏 고추잡채 중 제일 맛있다는 평이 압도적인가 하면. "맛있긴 한데 뭔가 평범하다. 나는 엄마 식 고추잡채가 좋다. 급식에서 먹었던 것과 맛이 똑같다.(두 아이 모두 중국집 고추잡채를 먹어본 적이 없음. 집 아닌 다른 곳에서 먹었다면 오직 급식.) 엄마 고유의 맛이 있다."라는 평도 있었다. 채윤이 평가이다. 이런 피드백 좋아한다.

현승이는 나중에 "이연복 셰프가 중식 전문이잖아. 무슨 명언을 남긴 게 있어. 엄마 알아?” 한 마디에 '이연복 명언, 이연복 띵언...' 엄청 검색해봤다. 저도 '뭐였더라, 뭐였더라' 한참 검색하더니 못 찾겠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건진 띵언이다. "가르쳐줘도 따라 할 사람만 하지 게으른 사람은 안 해요." 사실 나도 고유한 레시피 거침없이 유포하는 편이다. 요리는 특별한 걸 하는 게 없지만, 영성심리와 마음의 여정에 관한 한 나름의 팔살기 레시피가 있다는 자의식이다. 묻는 이에게, 필요한 이에게 아낌없이 공개한다. 나만의 레시피, 도서 목록, 통찰들.

가르쳐줘도 안 할 사람은 안 한다. 내가 몰랐던 것은 그것이다. 아니, 모르고 싶었던. 가르쳐주면 그대로 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그대로 하기만 하면 비밀병기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태도였다. 가르쳐줘도 하는 사람만 한다! 그렇지! 이런 태도라면 피 땀 눈물이 담긴 레시피 공개해놓고 속 끓일 일 없겠고만. 10년 넘게 그때그때 한 권의 책, 한 사람의 저자를 만나면서 그 저자가 소개하는 또 다른 저자와 소개팅하고 사귀면서 살아왔다. 누가 알려주는 길이 아니었다. 더듬더듬 홀로 만들어온 길이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면 과도하게 정보 투하하곤 했었다. 물론 나처럼 처절하게 읽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즈음엔 연구소 SNS든 블로그든 책 리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나처럼 읽지 않는구나,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읽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좋은 책들을 눈팅하거나 사놓고는 다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까지 닿았다. 여기 닿기까지 나는 얼마나 헤맸던가. 사람 사람 마음의 여정이 고유하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 고유함이 끝이 어딘지를 모르며 안다고 착각한 것이다. 기꺼이 공개해 온 레시피에 담긴 내 고독의 몸부림이 민망해 하며 배워가는 중이다. 사람 사람의 고유함을.

요리 고수가 되긴 멀었다. 이연복 쉐프처럼 "어차피 안 할 사람은 안 해요." 아직 그리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쯤 되면 뭣이 중헌지 헛갈리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나는 어떤 레시피들을 목록으로 저장해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적절한 레시피를 만나면 가능한 바로 해서 먹고 먹이기로 했다. 많은 레시피를 저장해 두고 마치 요리를 한 것처럼, 심지어 먹은 것처럼 착각하며 살진 않기로.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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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도시락 세 개를 쌌다. 모의고사 보러 가는 현승이 도시락을 싸서 보내고. 출근하는 JP의 도시락을 싸는데 연습실 가는 채윤이도 "나도 싸갈까?" 했다. 셋이 각각 다른 곳에서 같은 밥을 먹는 것이다. 이게 뭐라고, 마음이 찡하지? 사진의 도시락은 요즘 꼭 남매같이 지내는 아빠와 딸의 것이다. 채윤이가 교회 근처에서 알바 중이라 출퇴근 길에 자주 함께 하고 있다. 띡띡띡띡, 투닥투닥...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와 투닥거리는 소리가 둘의 퇴근을 알린다.

종끼~이, 종끼 싫어. 핵 싫어.
윤채, 윤채, 나도 너 싫어.
으으으으, 종끼 아빠!
으으으으, 윤채 김!

그러다 어떨 땐 육탄전까지. 먼저 시작하고 나중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쪽은 윤채 쪽이다. 고3 현승이가 야자 하느라 밤이 늦어야 집에 오니 싸울 시간이 없고. 갈고닦은 전투력을 아빠에게 쏟아붓고 있는지. 메롱메롱 유치 찬란한 남매 아니 부녀간 싸움이 볼만 하다. 불쌍한 JP. 이기는 적이 없다. 나름 유치 찬란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선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승기가 아빠 쪽으로 기우는 중, "아빠,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한 마디에 순간 JP 움찔. "아빠, 움찔하는 거 다 봤어! 내가 이겼어. 무섭지?" "뭐, 뭐, 뭐? 뭘 일러?" "소용없어, 내가 이겼어."

토요일 아침, 똑같은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하는 동안 둘은 계속 투닥투닥. 종끼 아빠는 거실에서 빨래를 정리하면서, 윤채김은 제 방에서 머리를 말리면서, 각자 볼 일 보면서도 투닥투닥. 그리고 같은 도시락을 들고 나란히 출근했다. 물론 현관에서 신발 신으면서도 빨리 해라, 하고 있다, 비켜라, 말아라, 투닥투닥.

진지하게 보는 첫 모의고사 중 현승이가 먹을 점심, 조용한 교회당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 하다 먹을 점심, 좁다란 연습실에서 이어폰 꽂고 드라마 짤 보면서 먹을 점심. 이 시간쯤 따로 똑같이 먹을 점심 풍경을 그려본다. 소중한 님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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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무기력과 우울감이 오래 가고 있다. 아침 준비하려고 앉았다 무심코 클릭해서 본 영상으로 반짝, 무엇이 들어왔다. 오, 오늘 아침은 이거야. 꾹꾹 눌러 모양을 만들어 토스터에 구운 식빵이다. 눌러 만든 모양에 잼을 채운다. 우울감이 천 리 만 리 달아났다.

 

하트는 제일 먼저 일어난 JP 용이다. 낄낄거리면서 하트를 제작하고 있는데 "손은 씻었어? 코딱지 판 손 아니지?"란다. 완성된 작품에도 감동 한 마디 없이 "어떻게 먹는 거야? 이대로 먹어? 더 발라?"한다.  

스마일은 김현승 몫이다. 신이 나서 굽고 만들고 하는데 뚱한 표정으로 "언제 먹어?"란다. "전체에 다 발라야 하는데 이렇게 주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하더니 스마일 무시하고 처발처발 해서 덤덤하게 처묵처묵 한다. 

 

다음 타자 부스스한 김채윤 등장. "뭐야? 뭔데?" "보지마, 보지마, 저리 가 있어. 엄마가 다 하면 부를게. 아직 오지마. 일단 너 웃는 얼굴이야, 화난 얼굴이야, 어떤 얼굴 원해?" "화난 얼굴" "오케이! 좀 이따 와." 또 신나게 세 번째 작품을 만들었다. 다 먹고 일어나던 김현승이 식탁 근처 못오는 누나 한 번 쳐다보고 그런다. "엄마,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아, 진짜 재밌어! 화난 얼굴은 딱 김채윤이다. 그러나 관심 없기는 얘도 마찬가지. 

그래도 셋 중 가장 큰 성의를 보여주었다. 제 취향대로 작품 활동 한 번 해주는 것으로. 조커 느낌도 나고 좋네!

냉담한 가족들, 너희들! 그래도 괜찮아. 사실 나는 내가 재밌으면 돼.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간에 재미 하나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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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하루다. 채윤이 확진, 나 확진, 현승이 확진. 잠재적 확진자 JP 항시 대기. 한 보름을 네 식구가 집에 머물며 지냈다. 채윤이는 슬슬 알바 출근을 하고, 아무리 기다리도 안 걸리는 JP는 슈퍼 항체 인정하고 출근하고, 하나 씩 나가다 드디어 오늘 격리 해제 현승이가 등교를 했다. 이런 오전 얼마만인가. 혼자만의 점심식사라니. 

 

기도하다 분심이 김치전으로 흘러갔다. 점심은 김치전이닷. 통김치전으로 배추 두 잎만 부쳐서 먹어야지 했는데 밀가루가 없네. 하루 이틀 장을 보지 말아야지 결심한데다, 밀가루 한 봉지 사러 바로 앞 편의점에 나갈 최소한의 열정도 없다. 그러나 김치전은 먹고 싶고... 뒤적뒤적 뒤적뒤적, 어떡하지?........................... 월남쌈을 발견했다! 밀가루를 대신할 탄수화물이 되겠다. 김치를 쫑쫑 썰어 설탕, 깨소금,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쳤다. 월남쌈으로 싸서 기름에 구웠다. 또 성공! 웬만한 도토리 전병보다 더 맛있네! 비주얼로는 김치전을 압도하고. 혼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김치 참 좋아한다. 나이 들수록 김치가 더 좋다. 김치가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다. 김치에는 탄수화물이지! 그래서 가끔 김치전이 땡기는 것도 같고.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다른 반찬 필요 없다. 막 한 밥이나 누룽지가 있으면 최고의 밥상! 나 정말 김치 좋아하는구나. 여기까지 갔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혼자 찬밥에 물 말아서 김칫국물, 깍두기 국물, 아니면 김칫국물 넣고 끓인 동태찌개를 먹었다. 다른 아무 반찬 없이. 그게 그렇게 궁상맞아 보이고 싫었었다. 돈 아끼려고 저러지. 엄마를 위한 모든 것에 인색한 것이,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 참으로 보기 싫었다.

 

엄마도 밥이랑 김치 콜라보의 그 맛을 좋아했구나! 깨달음이 꽈광, 하고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가난해서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처럼 먹을 것에 대단한 관심이 없고, 있는 걸로 최소한으로 먹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겠구나. 그 중에 밥과 김치가 좋았구나! 그렇지. 김치에는 밥이고 밥엔 김치지. 엄마와 달리 늘 새로운 게 좋고,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게 기쁨인 나는 밥을 대체할 다른 탄수화물을 찾아냈을 뿐이네.

 

코로나 빠져나온 낯선 어느 날 김치 월남쌈을 만들어 구웠고. 엄마 생각을 했다. 맛있게 먹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만날 수 없는 엄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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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식사. 샌드위치 하려고 재료 준비해놨는데. 아, 재료 준비시켜놨는데. 계란이 없는 것이다. '장보기' 기능이 너무나 안 되는 종필 덕분이다. 찌개용 돼지고기, 호박 한 개, 계란 한 판. 분명 내 주문은 그거였는데. 계란 없는 샌드위치가 불가능한 건 아닌데. 현승이가 계란 맛에 빵 먹는 애라. 어떡하지? 어떡할까? 하다 파니니가 창조되었다. 귀여운 와플 기계를 사서 냉동 크로와상 생지 쟁여놓고 크로플 꽤 만들어 먹었다. 함께 들어있는 파니니용 팬은 꿀호떡 구워 먹는 데만 썼고. 오, 파니를 할 수도 있잖아! 해봤다. 성공이다. 계란이 없어서 처음으로 파니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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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와서 더 놀고 가고 싶은데, 어른들 모시는 기사 노릇해야 해서 아쉬워하던 조카가 다시 놀러 왔다. 좋아하는 형, 오빠가 온다니 애들도 들떴다. 노는 월요일, 남편과 영화 약속이 있어서 장보는 시간이 애매했다. 큰 기대 없이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말하고 나갔다. 마트에서 돼지갈비 사다 핏물 빼는 것 해주면 좋을 텐데... 영화 보고 부랴부랴 장 봐서 왔더니, 오메 애들이 정확히 돼지갈비를 사다 찬물에 담가놓고 있네. 장은 심부름 달인 현승이가 보고, 핏물 빼는 건 유튜브 검색해서 채윤이가 했다고. 덕분에 김치찜 맛있게 해서 먹고 돼지갈비 한 팩이 고스란히 남았다.

갈비찜 양념 재우고 나가려고 심부름 로봇 현승일 편의점에 보냈다. 갈비양념 사오라 했더니 '돼지불고기 양념' 밖에 없다며 뻘건 걸 사 왔네. 그러면 매운 갈비 한 번 해보지. 시판 불고기 양념장에 시든 사과, 양파 갈아 넣고, 마늘 때려 넣어 양념해두고 연구소에 다녀왔다. 저녁에 와 압력밥솥에 찜을 했는데... 우와, 매운 갈비찜 좋네! "나, 아무래도 요천인가 봐." 했더니 남편이 "요천? 요리 천사? 맞아. 요리 천사야!" 해서 현승이가 뿜었다. 요리 천재지. 어떻게 거기 천사가 붙어?

잘했는데 뭔가가 틀어진 두 번의 심부름이 낳은 '포상 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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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요즘 블로그에 글은 안 쓰고 요리만 올라와?
엄마 실은 요리 블로거야... 음, 글이 안 써져.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뭔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글 같아. 글 쓰는 게 다 의미 없어. 먹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애.
그럴 거면 레시피도 같이 올려. 나중에 엄마 음식 먹고 싶을 때 내가 보고 만들게.
응, 그건 못해. 정해진 레시피가 없어.

이런 상황이다.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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